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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이 있던 자리

fpwjsemdn 2024. 1. 23. 23:59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었다. 2회 선정 도서였어요. 이런 저런 서문 없이 돌직구부터 날리자면……. 매우 당황스러운 소설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짱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알고 있던 신경숙씨가 아니었거든요. 물론 중간까지 읽다가, "아 신경숙은 박완서가 아니지 참……." 하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만 그래도 이 이질감은 좀처럼 잡기 힘들더라고요. 지금까지 신경숙 책을 두 권이나 읽어왔는데도 말이에요. 엄마를 부탁해 와 외딴방 에 이어 세 번째 책입니다. 잠깐 읽다 만 책까지 포함하면 네 권이고요. 감자먹는 사람들 까지 포함해서. 뭐랄까, 여성 작가의 소설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모가 있습니다. 성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라 생리적 특성이 다른 걸 어떻게 합니까. 다른 건 다른겁니다. 특히나 박완서씨가 그렇지요. 박완서씨의 작품은 하나같이 부드럽습니다. 마치 수채화로 풍경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 같이 아름답고 정교한 풍경들과 그 묘사에 빠져들게 만드는 동화같은 멋이 있지요. 그렇다고 가볍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름답다는 겁니다. 물론 신경숙씨의 작품이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충분히 아름답지요. 하지만 뭐랄까, 사람 내면의 아픈 자욱을 쥐어짜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신경숙씨의 작품은 아픕니다. 좀 어두침침하기까지 하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읽은 저 두 작품(혹은 셋)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여성의 기품이 있으며 읽을 수록 기성세대의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구성이 조금 독특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풍금이 있던 자리는요, 제가 태어난 해인 93년에 발간된 작품입니다. 단편집이지요. 그래서 그럴까요. 등단한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작품이라 그런지 아니면 단편집이라 그런지 좀…… 실험적인 느낌입니다. 소위 말하는 공모전이나 백일장용 글을 보는듯한 느낌이었어요. 한 번쯤 공모전이나 백일장에 기웃거려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아실 거에요. 일상적으로 접하는 그런 글들과 다른 어떤 그들만의 글을요. 대체적으로 실험적이고 트렌디하죠. 각 재단이나 상에 따라 성격은 조금씩 다릅니다만 어느정도 공통된 뉘앙스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그렇더라고요. 가장 먼저 나오는 단편인 풍금이 있던 자리 의 경우 주인공이 상대인 그 에게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개가 되고 있는데 이게 상당히 독특합니다. 읽기 불편할 정도로요. 정말이에요. 나는 지금까지 신경숙씨 소설을 보면서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든요? 집중이 안 된적도 없었어요. 엄마를 부탁해의 경우 야자 시간에 몰래 보면서도 다른 친구들 몰래 꺼이꺼이 울 정도로 심취해서 봤고, 외딴방의 경우에도 정말 다른 건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신경숙씨의 책에는 그런 매력이 있어요. 분명 자신의 이야기(혹은 화자의 이야기)를 함에도 이야기를 보는 누군가, 독자의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약이라면 마약이지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 불편했어요, 이 소설. 몇 번을 읽다 던지고 접고 졸려서 자고 도저히 못 읽겠어서 짜증도 내보다 체념하고 읽으니 읽히더라고요. 그럼에도 읽는 도중 숨이 턱턱 차서 읽기 힘들었습니다. 쉼표가 상당히 많아요. 주인공의 답답한 ……. 말줄임표도 한 몫 하고요. 그 에게 쓰는 편지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주인공 자신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글입니다. 자신은 그 의 불륜 상대지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불륜과 사랑이 그렇듯 그와 주인공 그녀의 마음도 진심입니다. 사랑이 생겨나고 변하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분명 제도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삶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만약 작가가 독자에게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전달하게 했다면 무조건 성공입니다. 답답해요. 책을 찢고 싶을 정도로 읽기 힘들었습니다. 그녀는 말 끝마다 말을 줄이고, 내쉬고 다시 이야기를 번복했다가 벼랑끝에 섰을 때 잠시 멈춥니다.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려는 듯이요. 독자도 그제서야 숨을 한 번 돌리고 문장을 읽어내려갑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이들의 마음을. 결국 도의적 양심과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은 그 를 놓아줍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겠죠. 새로운 사랑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륜은 나쁜가요? 나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웠듯이, 신뢰는 유대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근간이고 우리는 유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생물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신뢰를 깬다는 것에서부터 불륜은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요? 불륜이라는 범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A와 B아닌 B와 C와의 애정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민법 제 840조에 의거해 이 애정관계 란 비단 육체적 행위만이 아니라 정신적 행위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조금 오만한 생각이 아닐까요? 제도로 감정을 묶을 수 있다니요. 감히, 누가, 어떻게,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영화 이퀼리 브리엄 도 아니고 말이에요. 이 순수한 애정관계 에도 돌을 던지시겠습니까? 적어도 이 둘 사이에는 순수, 라는 관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도를 초월한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인정합시다. 불륜은 범죄지요. 그리고 동시에 사랑입니다. 법으로 처벌 가능하며 도덕적 책임을 물 수는 있지만 그들의 감정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취소 할 수는 있겠지만 무효 할 수는 없습니다. 조지오웰의 1984 에서 모진 고문에도 주인공 윈스턴과 줄리아의 관계가 무효화될 수 없는 것처럼요. ...멀리 와버렸는데 사실 제가 인상깊었던 단편은 풍금이 있던 자리 가 아닙니다. 그 뒤에 나오는 직녀들 이 제 눈길을 끌었어요.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멀리, 끝없는 길 위에 와 더불어 실린 단편 중 가장 좋은 단편이라고 생각해요. 주인공 S,C,O,P는 각자의 이름도 갖지 못한채 가변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 같습니다. 이름은 단지 알파벳으로 축약되고, 그 앞에 붙은 수식어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죠. 담배를 피는 C, 강아지를 좋아하는 S, 운전대를 잡는 O……. 마치 우리가 이름 대신 직업과 직급으로 불리는 것처럼요. 어머니는 이름 대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사장님은 이름을 잃어버린 사장님에 불과합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지금 사회에서는 단 한 번 이름을 불릴 시간도 없어요. 그럴 여유도 없는 모양입니다. 이들은 친구 이숙 의 죽음으로 인해 서로 멀어지고 그동안 갖고 있던 이름도 잃어버린채 사회를 방황합니다. 각자 맡은 수식어를 착실히 수행하며 그저 존재도 없이 살아가죠. 이숙의 죽음을 외면하겠다는 듯이. 그러다 어느날 만나 여행을 갑니다. 바쁜 일정도 어떻게든 처리하고 바다를 향해 전진합니다. 여행이 아니라 상여라도 끌고가는 것 같습니다. 생동감도 없고 오직 S가 안고있는 개만이 관조하듯 꿈뻑꿈뻑 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말 끝, 문장 말미마다 나오는 쉼표는 그런 그녀들의 단절감과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탁월한 역할을 합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숨이 턱 턱 막히는 느낌입니다. 이들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단지 쉼표 뒤에 숨어서 조그맣게 숨을 고를 뿐입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이어주지 않고 그 사이 섬에 숨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속도 없고 따라서 소통도 없습니다. 소통하지 않는 관계는 더이상 관계가 아닙니다. 유대감이 없으니 이들의 여행은 붕 뜨기만 합니다. 숙소도 제대로 못 정하고 하릴없이 의미없는 해변가를 서성이던 그녀들은 드디어 폭발한 O의 차를 타고 허둥지둥 떠나다 교통사고를 당해 모두 죽고맙니다. 인간미는 빠알간 피로 상징화되어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무거운 불소통의 시대가 끝나고 다같이 하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S의 강아지만이 살아남아 그 광경을 목격합니다. 나는 이 개가 독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현대에 들어와 더욱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소통도 없고 이해도 없습니다. 다들 자신만의 페르소나 뒤에 숨어 본성을 숨긴채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죠. 윤태호씨의 만화 미생에도 나오듯, 판에 들어가있는 사람은 판을 못 보기 마련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요. 그렇듯 이들은 이들이 무엇이 어긋났는지, 무엇에서 도망치려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릅니다. 각자 본성을 숨긴채 짜증만 내지요. 결국 화를 내는 건 가장 조용히 있던 O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S의 강아지는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고. 마치 판을 지켜보고 있는 독자처럼요. 이러한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예리하게 짚고있다는 점에서 직녀들 을 가장 인상깊은 단편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 외에 마치 김훈의 개 를 떠올리게 하는 저쪽 언덕 등이 있는데 별로 그렇진 않았고요.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신경숙씨의 단편 소설집으로 표제 풍금이 있던 자리 외에 직녀들 그 여자의 이미지 등 모두 9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